앞으로의 추억을 책임질 Nikon D90 + Sigma 30mm F1.4

 

그제 니콘 D90이 퀵으로 도착했다. 받아보고 나서야 바디 단품으로 사면 렌즈가 없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 구입하는 DSLR, 함께 주문한 17-70 표준줌렌즈는 월요일에야 도착을 한다 하고(오늘은 토요일;)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중고로 30mm f1.4 렌즈를 사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괜찮은 매물 구하기도 쉬운 일만은 아니어서, 결국 장터매복만 한 채 하루를 넘겼다.

다음날 아침 10시, 그러니까 어제, 나는 다시한번 좋은 매물을 발견했다. 판매자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바로바로 왔다. 파는 사람도 급했고, 사고자 했던 나도 마음이 급했다. 2시에 신도림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모르는 사람과 거래하러 가는게 영 마음에 걸리는지 사기당하는건 아닌지, 그냥 새거 사는게 어떤지, 판매 끝나자마자 문자 넣으라며 꼼꼼히 걱정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그 모든 걸 기우로 치부하고 외출을 서둘렀고, 무려 약속장소에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판매자의 문자, 지하철 1호선이 사고가 났단다. 학창시절 지각할 때 늘 사용하던 구구절절한 레파토리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택시까지 타고 오는 성의를 보여줬고, 인천 부근에 지하철 사고가 발생해 부천까지만 운행한다는 안내방송은 그의 말을 증명했다. 나는 1번 출구에서 꼬박 40여분 동안 그를 기다렸고, 곧 전화가 걸려왔다.

렌즈를 파는 사람은, 여자였다..!

'나쁜 1호선 때문에 늦었어요ㅠㅠ 많이 기다리셨죠? 택시비가 2만원도 넘게 나왔어요ㅠㅠ'

오랜 기다림의 지루함이 설렘으로 변하는 순간-_-!!

순간적으로 지금, 소개팅을 하러 나온건가(!) 하는 착각에 빠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가 애지중지 했다던 렌즈를 내 D90에 마운트 하려고 했다. 똑딱이 만지는데는 이골이 났던 나지만 막상 처음 만져보는 DSLR의 세계는 오묘해서, 부끄럽게도 바디에 렌즈를 어떻게 끼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이거 좀 끼워주세요;; 처음이라'

'어머, 완전 처음이신가봐ㅋㅋ'

왕 민망-_-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끼워주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커먼 아저씨랑 앉아서 이러고 있는게 아니라, 젊은 여자 옆에서 부들부들 거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첫 단추를 잘 끼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첫 중고거래를 여자분과 함께 시작한 것이다!

'한번 찍어보세요 이 렌즈는 F값이 낮아서 주변이 확 날라가거든요'

여자는 나의 어리버리함에 다소 안심(?)한 듯했고, 나 또한 상대방이 카메라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기분이 상큼해졌다.

'어떻게 찍는지 모르겠네요ㅋㅋㅋ 전역한지 얼마 안돼서ㅋㅋ'

전역한지 얼마 안된 건 맞는데, 사진 촬영은 전역과 관계가 없지 아마; 어설프게 가격 네고를 시도하려 했지만, 역시 상대가 여자라는 점에서 마음이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게다가 더 늦지 않으려고 택시비까지 내면서 왔다는데.. 그렇다면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사주는게 도리겠지? 결국 기꺼이(?) 렌즈값을 지불하고 사이좋게 개찰구를 통과한 뒤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온 그녀의 문자, '이쁜 사진 많이 찍으세요~~^^'

네^^ 색다른 경험이었다! 미키는 직장인 아저씨랑 중고거래를 했다던데, 이만하면 꽤 상큼한 첫경험인데!?

집에 오자마자 자칭 DSLR 전문가 미키에게 연락을 했다. 6시에 볼까? 5시 20분에 볼까? 5시에 볼까??

중고거래 급만남에 이은 친구와의 급만남. 거기에 용민이까지 더해져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무료획득의 추억을 남기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한 뒤 후일을 기약했다. 손 흔들어 용민이를 보내고 20걸음 지나 횡단보도에는 파란 불이 켜졌다.

서둘러 걸음을 딛으려던 나는 한순간에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세 명이서 소주 한 병 조차 다 비우지 못했는데, 술기운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안경은 아예 박살이 났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방배역 앞 사거리에 나 홀로 비참했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박살난 안경과 뚝뚝 떨어지는 피.. 1분 전만 해도 그 어떤 비참함이란 없던 즐거운 하루였는데, 빨간 피는 그 자체로 반전이었다.

오른쪽 뺨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민망함은 알았는지 몸을 일으켜 혹 가장 뒤에 헤어진 용민이가 본 건 아닐까 싶어 최대한 멀쩡한 척 일어나 달음질쳤다. 손으로 끊임없이 뺨을 훔친 탓에 손바닥에 피가 흥건한 와중에도 나는 가방 안에 담겨있던 카메라 걱정을 했다. 그제서야 어머니께서 왜 그리 오늘 불안하다며 걱정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원맨쇼였나!

코 옆은 깨진 안경알이 그은 상처가, 시멘트 바닥에 짓이겨졌던 뺨은 검게 탄 고기처럼 변해 끊임없이 진물을 쏟아냈다. 어머니께 크게 혼이 났다. 어머니의 예감이 맞았다. 사람이 지나치게 들떠 경망스러워지면 화를 입는가보다. 얼굴에 이만한 상처는 내 25년 인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카메라는 무사했다. 좀 전의 충격으로 렌즈캡이 렌즈 경통에 살짝 꼈지만 무사히 떼어냈다. 구입하자마자 이런 화를 입다니, 렌즈의 화(禍)인가!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첫 단추 잘 끼웠다고 생각했건만. 그래도 렌즈는 렌즈캡이 있어 무사했고, 눈도 눈꺼풀이 있었기에 무사했다. 눈을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오늘, 상처가 심한 편이라 피부과 대신 성형외과를 갔다. 어쩌다 이리 많이 다쳤냐고 하는 의사의 말에 대답을 하다보니 자체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렌즈를 사고 설렌 마음, 술 마시고 설레발대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다..

모쪼록 이걸로 액땜이 되었기를 바라본다. 그것 말고는 아픔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방법이 없기에. 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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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10/01/25 12:08
60대가 되어도, 어머니의 눈에는 항상 주의가 필요한 아가로 보이겠죠. 그걸 깨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냥 얼굴을 아스팔트와 뽀뽀하셨네 그려... 아프겠어요. 성형외과에 갈 정도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사진과 연관되었으니, 그 여자분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고. 마냥 설렘?
중고 거래라는 것을 한 번도 하지 않아본 나이기에. 할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만큼 팔만한 물건 없음.. 그냥 소모품만.

렌즈가 잘 작동한다니..ㅋㅋㅋ
멋진 사진 잘 남겨봐요. 구경하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상도 재미있어서요.
DSLR은 똑딱이보다는 사진은 잘 나오는 것 같으나, 너무 무겁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저는 계속~ 똑딱이 쓸 생각이네요.

얼굴 잘 낫고, 추운 겨울 잘 보내요. ^^
BlogIcon BOK2 
wrote at 2010/01/25 21:36
그래도 주말 간 무리않고 잘 쉬어서 아물고 있는 상태랍니다.. 약 원체 잘 안먹지만 이번만큼은 얼굴이라 꼬박꼬박 챙겨 먹었죠..ㅎ

얼굴 반창고 사이즈만 좀 줄어들면 바로 카메라 들고 달려나갈겁니다ㅠㅠ!!
백승재 
wrote at 2010/01/25 18:58
흥 자기만을 위한 블로그!! ㅠㅠ게시판열어줘잉~이런 리플따위로 나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아 ㅋㅋㅋㅋ아 춥다 ㅠ급추워졌어 우째 너만 만나면 날이 조낸 추워지는 것일까?이것에 대한 고찰을 연구논문으로 낼 수 있지 않을가?
BlogIcon BOK2 
wrote at 2010/01/25 21:37
ㅋㅋㅋ 성복닷컴 부활의 서막인가?!ㅋㅋㅋㅋ 나도 내가 외출만 하면 추워지는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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