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술이 났다. 올해 초의 평정심은 온데간데 없고, 잔인하리만치 독해진 마음이 어느새 가슴을 좀먹기 시작했다. 보고싶지 않은 장면들, 듣고싶지 않은 이야기들, 끊임없이 도덕성을 시험하는 짙어지는 빈곤함이 미웠다. 세상의 수많은 일들이 지금의 내 터전을 가득 메우고 무너뜨릴 것도 아닌데, 그 지리한 것들이 마치 내가 사는 사회의 전부인 것처럼,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낙엽 드리운 쓸쓸한 교정은 그래서 그렇게도 나를 불렀는가 보다.

떠나고 싶다. 재작년의 고독함을 고고함이라 치환해도 이제는 어울릴 것만 같은데. 그땐 홀로 교정을 거닐어도 꿈과 희망이 있었으니까. 매몰되어 가고 있다. 시간은 나를, 공간도 곧 나를, 그리고 내 곁에는 한결같은 내 어머니, 항상 변치않고 내 어두운 장막을 밝혀주시는, 나를 저 어두운 곳으로부터 나를 꺼내주신, 나의 변화를 누구보다 기뻐하시고, 나의 무거움도 언제나 애타게 바라봐 주신, 내 어머니.

교육심리 시간 MBTI 성향에 따라 편성된 사람들, 그들에게서 과거의 나를 발견했다. 내게서 부족한 것들, 외향적인 것들, 그래서일까, 나는 활달한 사람들이 참 좋다, 은연중에 나도 그러한 쪽을 닮아간걸까, 그 조에 앉아있기가 왜 그리 불편했을까. 그곳에서 나의 본질을 발견했던 것일까, 변해버린 본질이기에 그들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닥 유쾌하지 않은 조편성, 하지만 옛 세계로 얼마간 돌아가 보니, 그곳에는 과연 과거의 내가 서 있었다.

몸이 기운다. 떠나보내던 그 지하철이 흘러가버린 그 날처럼, 내 몸이 기운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건 어쩌면 네가 아니라 너를 통해 내 안의 폐허를 보듬어줄 한 줄기의 희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너와 나의 이야기는 나를 고독한 심연 속으로, 꿈으로, 슬픔으로, 환영으로, 차츰 매몰시켰다.

슬픔이 깊으면 심술도 지독해 지는가보다. 점점 더 나를 학대하고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심술쟁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의 메마른 보호본능은 때로 타인의 친절에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남에게 떠넘기는 자신의 진심이 때론 그에게 잔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내게서 자신과 닮은 부분을 떼어간다.

여전히 내 자화상은 학교 앞 길거리에서 쓰러진 채 울고 있다. 그날 이후로 어그러진 내 뺨, 내 성격, 내 정신. 올해 그대들 셋이 하나씩 나에게 새겨준 것들을 돌아보면서, 그러나 감성적 빈곤의 타성에 젖어버린 나는, 그날 이후로 당신들의 눈을 성의껏 응시하려던 노력을 버렸다. 당신들의 눈동자 속에 무기력한 내가 비쳐질 것이, 맺힌 상을 내 눈동자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고 그 과정이 하필 당신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라면, 난 결코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결국 내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린 스물두살의 가을.

무가치한 회상은 과거를 돌이키고, 과거가 재생되고 있는 현재, 그것이 남기는 것은 또다른 과거의 분신, 과거도 현재도 곧 모두 과거로 돌아가 버리는, 무기력한 기이함을 탓하며, 오늘은 시험공부를 해야해서 술을 마실 수 없노라고, 하지만 적당히 취해서 마음이 편해졌으면 한다며, 그저 부질없는 심술을 부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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